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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기고]주디스 버틀러의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 젠더, 반젠더 운동, 그리고 다양성

조회수347 등록일2025-09-23

[DIWiTH 다양성 기고]

주디스 버틀러의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 젠더, 반젠더 운동, 그리고 다양성


윤조원 위원장

윤조원 (고려대학교 다양성위원장 / 인권·성평등센터장)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와 권력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통해 젠더 이론을 혁신한 철학자이자 공적 지식인이다. 그는 1990년 저서 『젠더 트러블Who’s Gender Trouble』로써 퀴어 이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상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연구와 저술은 어느 한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을 옹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급진적(radical)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활동이라고 평가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의 사유에서 급진적 민주주의란, 누가 ‘인간’으로 인정받고 사회의 ‘정상적’ 구성원으로 식별되고 ‘애도’의 대상이 되는지를 규정하는 조건들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조건들을 근원적으로(radically) 비판, 수정하여 불평등한 정치적 존재의 장을 재편하는 지속적 수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급진적 민주주의를 향해가는 노력은 인간의 필연적 상호의존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연대와 비폭력적 저항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버틀러는 여성, 성 소수자, 젠더 소수자뿐 아니라 난민, 이주 노동자, 무국적자, 장애인, 전쟁 포로, 빈민 등, 이른바 규범 사회를 구성하는 인식의 장에서 비가시화되고 실재를 부정당하기 쉬운 모든 취약한 이들이 인간이자 정치적 주체로서의 존엄과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평등하게 보장받아야 한다고 그의 수많은 저작에서 역설해 왔다. 


   버틀러의 신간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Gender?』(문학동네, 2025)는 ‘젠더’를 둘러싼 논쟁의 실체와 이 시대의 극우 정치의 확산에 대한 이야기다. 버틀러는 이제 자신이 젠더 이론 자체를 연구한다기보다는 젠더를 논의하는 수많은 입장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상호작용하는지, 그리고 여러 다른 입장 사이에서, 여러 사회에서 젠더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며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지, 젠더가 문화적·정치적 현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추적하고 분석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는 젠더 개념이 왜곡되어 사회적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이 시대를 성찰하면서, ‘젠더 이데올로기’로 지칭되는 왜곡된 젠더 개념의 비논리를 반박하고 그처럼 왜곡된 관념에 얽힌 문제들의 실체를 직시하기 위해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그의 글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이 시대의 현실에서 왜 젠더에 관한 사유와 교육이 거대한 오해와 반발에 직면하는지, 그런 오해, 무지, 반발이 어떠한 정치권력으로 작동하는지, 소수자뿐 아니라 모두의 인권을 탄압하는 이 시대의 비민주적·반지성적 권력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실천적인 논의라 할 수 있다. 


   버틀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공식화한 ‘논바이너리’(non-binary)로 자신을 규정한다. 그는 평생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identify)하기 어려웠다고 말한 바 있다. 버틀러가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한 것은 이원적 성별 구분의 한계를 비판하며 젠더를 유동적·사회적으로 구성된 범주로 이해해 온 학자로서 자신의 철학을 정치적 실천으로 옮긴 행위이다. 캘리포니아주가 2019년부터 운전면허를 비롯한 신분증에서 ‘X’라는 범주를 설치하여 논바이너리 성별 표기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법적·행정적 환경을 마련한 것은 버틀러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공적·공식적 맥락에서도 표현하기 쉽게 만든 제도적 지원이었다. 


   그런데 2025년 1월, 도널드 트럼프는 <젠더 이데올로기 극단주의로부터의 여성 보호 및 연방정부 차원의 생물학적 진리 복원>이라는 행정명령을 통해 연방정부가 공식적으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생물학적 성별(sex)만을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성을 보호하겠다는 명분하에 이루어진 이 행정명령은 우선 규범적 성별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소수자들이 여성에게 위협이 된다는 비합리적 전제 위에 있다. 또한 논바이너리나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의 존재를 법적·사회적으로 부정하고 삭제하여, 이 집단의 취약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막고 그들이 겪는 고통이나 차별이 공적 언론·정책·제도에서 무시되는 조건을 강화한다. 젠더 유동성은 다양성의 핵심 축 중 하나다. 두 가지 ‘자연적’ 성별만 있고 이것이 불변의 “생물학적 진리”라는 선언은 규범화된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존재를 사실상 인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다양성의 범위와 가능성을 제한한다. 이미 우리가 목격했듯이 트럼프의 반-다양성 정책은 이민자들, 이주 노동자들을 단속하기 위한 대규모 무차별적 군사작전, 그리고 대학 캠퍼스에 자리잡은 여러 다양성 정책을 억압하고 철회하는 결과를 낳았다.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는 트럼프의 두 번째 대통령 당선 이전에 쓰여졌기에 트럼프의 이런 반다양성 정책과 그 여파를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트럼프 당선 이전에도 젠더 다양성에 관한 우파 정치인들 및 극우 기독교 세력의 반대가 동등한 인권을 인정받기 위해 다양한 구성원들이 이어온 오랜 투쟁의 성과를 뒤집고 다시 과거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벌이고 있었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일부 지역에서는 젠더 관련 교과목뿐 아니라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학교와 교과과정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행되고 있다. 트럼프는 이미 존재하던, 그리고 지구적으로 확산하는 우경화를 부추겨 자신의 정치 자산으로 적극 활용하는 징후적 인물일 뿐 그 원인은 아니다. 


   젠더 이론의 선구자인 버틀러는 종종 젠더를 비롯한 다양성에 반대하는 우파 세력의 표적이 된다. 반대자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자연적·정상적’인 가족의 가치를 훼손하는 위험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젠더 이론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기도 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비논리적 공격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의 움직임(이를 일종의 백래시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은 버틀러라는 연구자 개인에 대한 반감을 초과하는 현상으로, 이 시대의 한 가지 증상이 되었다. 그들은 그가 퀴어한 사람들, 트랜스인 사람들의 인권과 자기결정권, 탄압받으며 위태롭게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평등권과 인간적 존엄을 옹호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래서 버틀러는 극우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공격 대상을 집약하는 표상이 된다. 반대자들 일부는 그가 미국과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대규모 폭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그 폭력에 희생되는 이라크 전쟁포로,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 팔레스타인의 민간인들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유대인인)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기도 했다. 반대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그를 공격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 위협했으며 그의 강연장 밖에서 시위를 벌인다. 


   우리나라에서 버틀러와 그의 연구는 1990년대 이래로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터이지만, 2021년에 세계적인 석학들의 문제의식과 이론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EBS의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시리즈를 통해서 일반 대중에게도 소개되었다. 이때 일부 기독교 단체와 반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다. 이들은 버틀러가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퍼뜨리는 ‘반윤리적’ 위험인물이라는 반대론을 그대로 반복했다. 이는 버틀러(와 그로써 표상되는 젠더 논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반발이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세력에 힘입어 국경을 넘어 움직이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EBS의 제작진이 단호히 대처한 덕에, 그리고 학계와 독자들의 지지 덕분에, 젠더와 욕망, 주체성, 자아와 권력의 문제를 아우르며 인간과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그의 강의가 우리나라의 일반 시청자들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


   <위대한 수업>을 둘러싸고 격하게 일었던 반발과 항의는 버틀러가 그러한 질문을 하게 된 이유인 동시에,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에서 그가 추적하는 반(反)젠더 운동을 그대로 예시하는 사건이다. <위대한 수업>에서 버틀러는 젠더에 관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왜 이 단어는 소란을 일으키는 걸까요?” 사실, 버틀러가 일찍이 제시했던 젠더 이론부터가 성별과 젠더라는 개념의 기저를 파헤쳐, 이분법적 논의로 포괄할 수 없는 젠더의 의미와 작용을 이론화함으로써 소란을 일으킨 일종의 사건이었다. 성별 이원론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유일한 진리로 여기게 만드는 권력의 특정한 작동을 문제 삼으면서 기존 질서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도전이 필연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꿈꾸는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젠더는 이미 그 언급만으로도 불편함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무언가였는지도 모른다. 젠더가 언제나 위태롭게 유지되는 질서라는 사실, 젠더 정체성 자체가 불안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젠더가 인식론적이고 정치적인 혼란의 계기로 등장하는 한 가지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논점은 오늘날의 현실과 직결된다. 이 책은 “왜 이 단어는 소란을 일으키는 걸까요?”라는 버틀러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젠더에 대한 반대와 혐오의 목소리가 높아진 현상을 두려움으로 진단하고, 젠더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해부하여 그 두려움이 어떻게 작용하고 조장되는지, 그 두려움의 확산에 어떤 정치적 기획과 실패가 연루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버틀러는 공교롭게도 계엄령이 선포되던 바로 그날 서울에 도착해서 서울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그를 한국의 학술 행사에 초대하려는 시도가 그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그를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게 하는 기획이 쉽게 성사되지는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12월 버틀러가 서울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지만, 버틀러의 방한 일정이 알려지면서 주최측에는 개신교 반대자들을 중심으로 강연을 취소하라는 민원이 폭주했다. 버틀러를 포함해 여러 사람의 안전을 고려하여 강연 시간과 장소를 급히 변경하는 ‘작전’이 펼쳐지는 사이, 그는 예정된 강연 날짜보다 하루 앞서 한국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밤,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이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사당에 병력을 투입했다. 


   버틀러의 방한과 윤석열의 계엄 선포라는 두 사건은 무관하지만 무관하지 않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 이탈리아의 멜로니 등 신흥 권위주의 정권, 스페인의 극우 정당, 영국의 ‘트랜스 배제 페미니즘’ 논쟁, 미국 보수파의 반(反)각성(Woke) 운동 등에서 볼 수 있듯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정치적 우파와 바티칸, 보수 개신교 세력이 반젠더 운동과 합세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이처럼 권위주의와 극우 세력이 부상하는 가운데 젠더와 페미니즘, 인권이 어떻게 왜곡되어 반민주주의를 위한 무기로 사용되는지를 분석한다. 그는 유럽, 미국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발견된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는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관한 내용도 이 책에 간략하게나마 등장한다. 버틀러는 그가 반페미니즘 인사였으며 실제로 정권을 잡는 데 반페미니즘을 전략적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반헌법적 계엄령 선포는, 이 책에서 버틀러가 역설하듯, 페미니즘과 젠더 논의에 반대하는 권력이 여성과 소수자를 탄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상을 배반하고 보편적 인권을 억압하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권위주의 독재라는 사실을 증명한 사건이다. 모두가 누려야 할 ‘살 만한 삶’의 조건들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철학자 버틀러는, 바로 자신이 세계의 반젠더 경향을 추적하며 주목했던 권력자 중 한 명이 민주주의 시민 사회의 기반을 군사적 통제와 강압으로 무너뜨리려 시도하는 현장을 목격한 셈이다. 강연장을 찾은 100여 명의 청중과 함께 버틀러는 차이와 이견을 가로지르는 연대를 통해 급진적 민주주의의 이상을 사수해야 할 우리의 책임,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계 각지의 보수 정권과 극우 단체 및 보수 기독교 세력의 주도하에 젠더 평등 정책, 성소수자 인권, 재생산에 관한 여성의 선택권을 둘러싼 반대 운동이 이른바 ‘젠더’ 혹은 ‘젠더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조직되고 펼쳐진다. 버틀러는 이 운동들을 추적하여 그 중심에 자리한 혐오의 뿌리를 파헤친다. 이 운동을 주도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이들은 젠더에 대한 오랜 철학적·과학적 연구와 다양한 논쟁 및 실천의 전통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젠더’가 인간 삶의 자연 질서를 파괴하는 그릇된 이념 즉 헛된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한다. 이러한 운동은 개별 국가에서뿐 아니라, 유럽 내외에서, 심지어 아프리카와 미국을 연결하는 보수 기독교 세력 네트워크를 타고 국경을 넘어, 널리 자금과 전략을 공유한다. 


   젠더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과 공포를 선동하여 사회적 불만을 외부로 전이시키는 정치적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권위주의의 감정 정치이다. 버틀러는 신자유주의의 가속화 속에서 불가역적으로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 안전망이 파괴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파괴되는 이 시대의 만연한 두려움이 쉽게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 외부의 대상으로 투사된다고 진단한다. 익숙한 삶의 토대가 무너져간다는 위험 신호가 일상에서 감지되지만 위험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현실적으로 해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이 시대의 문제이며, 젠더에 대한 두려움은 이 상황에서 상상적으로 발생하는 “판타즘”(phantasm)의 구조라는 것이다. 판타즘은 허상, 허깨비, 환영 같은 심리사회적 현상이다. 젠더는 가족, 국가, 민족 등의 전통이 약속하(지면 결코 보장하지 않)는 안정된 삶의 토대를 뒤흔드는 것으로 낙인찍힘으로써 공격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이 사고의 폭력성은 나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괴물’의 폭력성으로 투사되어 정당화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상적 ‘괴물’이 바로 버틀러가 말하는 “판타즘”으로서의 젠더이다. 


   젠더에 실체적 의미가 없다는 믿음 때문에 젠더가 판타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이 상정하는 ‘젠더’야말로 실체가 없는 것임은, 젠더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탈식민주의의 산물이라는 무분별한 공격에서 드러난다. 버틀러는 이렇게 젠더를 왜곡하는 공포 담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제적 불안정, 폭력, 불평등과 같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투사하거나 과잉단순화하여 복잡한 현실을 호도하고 공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진단한다. 젠더라는 판타즘은 집단 구성원들의 공포를 조장하고 피해의식을 부추겨 권위에 순응하게 한다. 극우 세력과 권위주의 정권은 젠더를 공통의 적으로 상정함으로써, 불황, 경제적 양극화, 실업과 고용 불안정, 복지 정책의 철회, 보편적 보건 정책의 축소, 공교육의 실패 등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들을 은폐하고 그 문제들을 향해야 할 분노와 혐오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위협의 환상을 조장하는 행위는 권위주의적 정치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 


   젠더를 둘러싼 극우 포퓰리즘 정치는 단지 젠더 소수자의 인권을 억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극우 혐오 세력은 젠더를 타깃으로 삼을 뿐 아니라 다양성의 여러 핵심 쟁점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한다. 젠더는 인종·민족·종교·이주민 문제까지 포괄하는 배제와 혐오의 정치를 포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상징이자 캐치프레이즈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젠더를 단지 학술적 의미에서만 살피는 대신 민주주의 사회의 존속을 위한 윤리적·정치적 토대로 이해하는 버틀러의 입장은 이 시대 우리의 현실을 개선하는 노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성평등 교육과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반대에 직면해 있고, 페미니즘은 종종 폭력마저 유발하는 쟁점이 되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되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젠더’는 판타즘이다. 소수자의 평등권을 포함하는 진보적 의제들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파괴할 것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층과 보수 권력의 폭력성을 은폐하는 논리로 등장한다. 대학 내 다양성위원회 설치율은 여전히 너무 낮고,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다양성·포용 정책이 형식적 절차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다양성의 가치가 아직 충분히 사회적 합의로 자리잡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상황을 읽는 데 강력한 비판적 도구를 제공한다.


   다양성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조건이다. 이는 『위태로운 삶Precarious Life』, 『비폭력의 힘The Power of Nonviolence』 등의 이전 저작에서 버틀러가 강조한, 취약성(vulnerability)과 애도 가능성(grievability) 같은 개념과 맞닿아 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모두 취약하지만, 취약성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동등하게 인식되지도 않고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도 않다. 한 인간과 그의 삶의 가치의 척도로서 애도가능성도 마찬가지다. 이 불평등한 분배 구조는 다양성의 위기와 직결된다. 다양성은 여러 다른 집단의 병존을 가리키는 기술적(記述的) 용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의 취약성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애도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동등한 존엄성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모든 이의 취약성과 애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다양성을 방어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단순한 정치적 올바름이나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심장을 지키는 작업이다. 젠더를 비롯한 다양성을 민주적 공존의 필요조건으로 재정립하고, 다양성을 옹호하는 실천이 곧 불평등한 세계를 교정하려는 정치적 투쟁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모두의 과제이며 우리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다. 


   버틀러는 집단의 동질성과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질서와 도덕을 회복한다는 명분하에 다양성을 위협으로 여기고 정체성과 공동체를 닫힌 것으로 규정하고 차이를 부정하는 정치가 바로 이 시대의 파시즘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양성의 가치를 지키고 확장하여 연대를 복원하는 일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적·윤리적 실천의 일부임을 역설한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어쩌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현실, 우리 사회의 균열, 우리의 불안하고 모순적인 내면과 조우하게 해준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는 언제나 미완성이다. 그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이면에 깊이 뿌리 내린, 인간됨의 조건과 정치적 자격을 배타적으로 규정하는 공고한 경계를 허물고 재조정하는 어려운 작업이기에, 끊임없는 공동체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버틀러의 비판적 시각은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사납고 교묘하게 다수를 능멸하는 이 시대의 폭력에 맞서 우리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지침이 될 것이다.


책


주디스


주디스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주디스 버틀러 편. 2021년)


강연

2025년 12월 4일, 주디스 버틀러 서울 강연